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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절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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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 절민제는 북위 효문제의 동생인 광릉왕 원우의 아들로, 531년 이주세륭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보태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이주씨 일족의 권력 장악 속에서 정책에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려 했으나, 고환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532년 독살되었다. 서위에서는 그를 절민황제로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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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절민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원공
시호절민황제 (節閔皇帝; "자제력 있고 신중한")
묘호없음
원공 (元恭)
수업 (脩業)
소자없음
왕조
씨족북위
출생498년
사망532년 6월 21일
재위
즉위일531년 4월 1일
퇴위일532년 6월 6일
연호보태 (普泰)
재위 기간531년 - 532년
계승자원랑
선임자원엽
가계
아버지원우
어머니왕씨
배우자 종류
배우자이주씨

2. 생애

효문제 원굉의 동생인 광릉왕 원우(元羽)의 아들로 태어나 정시(正始) 연간(504년~508년)에 광릉왕의 봉작을 이어받았다. 초기에는 산기상시, 급사황문시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원차(元叉)가 조정을 장악했을 때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말을 못하는 척하며 용화불사(龍花佛寺)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5]

530년, 모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5] 같은 해 효장제 원자유(元子攸)가 시해된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주세륭(爾朱世隆) 등 이주씨 일족에 의해 531년 2월 황제로 추대되어 연호를 보태(普泰)로 개원하였다.[5] 그러나 실권은 이주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절민제는 이들의 꼭두각시 황제에 가까웠다.

531년 6월, 장군 고환이 이주씨 타도를 내걸고 거병하여 532년 한릉 전투에서 이주씨 세력을 격파했다. 낙양에 입성한 고환은 처음에는 절민제를 유임시키려 했으나[6], 주변의 반대로[7][8] 결국 그를 폐위시키고 숭훈불사(崇訓寺)에 유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32년 5월, 고환이 보낸 사신에 의해 문하외성(門下外省)에서 독살되었다.[5] 이후 서위에서 절민황제(節閔皇帝)로 추증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498년 효문제 원굉의 동생인 광릉왕 원우(元羽)와 그의 이었던 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5] 그의 아버지는 헌문제의 아들이자 효문제의 형제였다. 원공에게는 형 원흔(元欣)과 동생 원영업(元永業)이 있었다. 아버지 원우는 501년 선무제 치세에 피살되었는데,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형 원흔이 있었음에도 원공이 정시 연간(504년~508년)에 광릉왕 작위를 이어받았다.

원공은 자신감 있고 의지가 강했으며, 할머니인 맹 태후와 아버지의 정실 부인인 정씨(정시용, 유교 교리에 따라 어머니로 모셔야 했다)에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산기상시와 급사황문시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5]

원차가 효명제를 섭정하며 권력을 장악하고(520년~525년) 부패와 폭력적인 행태를 보이자, 원공은 이를 피하기 위해 병을 핑계로 말을 못하는 척하며 불교 사찰인 용화사(龍花寺)에서 지냈다.[5] 530년, 사촌인 효장제 원자유 치세에 누군가가 원공이 실어증을 가장하고 실제로는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효장제에게 보고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원공은 두려움에 상주의 상락산(上洛山)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체포되어 수도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오랫동안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모반을 꾀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결국 석방되었다.[5]

2. 2. 황제 즉위

530년 효장제 원자유(元子攸)가 시해된 후, 장광왕 원엽(元曄)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곧 이주세륭(爾朱世隆) 등 이주씨 일족과 사이가 멀어져 폐립이 모의되었다.[5] 원엽이 북망산(北邙山) 남쪽으로 갔을 때, 이주세륭은 그에게 광릉왕 원공에게 선양할 것을 강요하였다. 태위 이주도율(爾朱度律)이 원공을 맞이하여 궁궐로 들어갔다.[5]

531년 2월, 원공은 태극전전(太極前殿)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보태(普泰)로 개원하였다.[5] 3월에는 폐위된 장광왕 원엽을 동해왕(東海王)으로 책봉하였으며, 주요 인물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물관직/작위
노군왕 원숙(元肅)태사(太師)
패군왕 원흔(元欣)태부(太傅), 사주목(司州牧), 회양왕(淮陽王)으로 개봉
이주중원(爾朱仲遠)대장군
이주천광(爾朱天光)대장군
이주조(爾朱兆)천주대장군(天柱大將軍)
고환발해왕(渤海王)
이주세륭태보(太保)



즉위 후 절민제는 자신의 칭호에서 '황'(皇) 자를 빼고 단순히 '제'(帝)로 칭했으며, 경쟁국인 남조의 양나라를 더 이상 '가짜'(偽)라고 부르지 않도록 명령하는 등 독자적인 정책을 펴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아버지 원우(元羽)를 황제로 추존하고, 어머니 왕씨는 정왕비(원우의 정실 부인)를 존중하여 태후로만 추존했으며, 형제 원영야(元永業)를 고밀왕(高密王)으로, 아들 원서(元恕)를 발해왕(勃海王)으로 봉했다.

2. 3. 재위 기간과 폐위

531년 2월, 이주세륭 등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태극전전(太極前殿)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보태(普泰)로 개원하였다.[5] 3월에는 폐위된 장광왕 원엽을 동해왕(東海王)으로 봉하고, 원숙(魯郡王 元肅)을 태사(太師)로, 원흔(沛郡王 元欣)을 태부(太傅)로 삼았다. 또한 이주중원(爾朱仲遠)과 이주천광(爾朱天光)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이주조(爾朱兆)를 천주대장군(天柱大將軍)으로 임명했으며, 고환을 발해왕(渤海王)에 봉하고, 이주세륭을 태보(太保)로 삼았다.

절민제의 재위 기간 동안 이주씨 일족은 중앙 정부와 지방, 군대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주세륭이 중앙 정부를, 이주조가 북부 지방을, 이주천광이 서부 지방을, 이주중원이 동남부 지방을 통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절민제는 미묘하게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 했으며, 때로는 이주세륭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주세륭이 효장제의 이주영(爾朱榮) 살해를 비난하는 내용의 사면 칙령 초안을 작성하게 했을 때, 절민제는 이를 거부하고 직접 간결하고 겸손한 어조의 칙령을 작성했다. 또한 자신의 칭호에서 '황'(皇) 자를 빼고 '황제'(皇帝) 대신 '제'(帝)로 칭했으며, 전임 황제였던 원엽을 존중하여 동해왕으로 봉했다. 경쟁국인 양나라를 더 이상 '가짜'(偽)라고 부르지 않도록 명령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원우를 황제로 추존했지만, 어머니 왕씨는 정실 왕비였던 정씨를 존중하여 태후가 아닌 왕태비(王太妃)로 추존했다.

그러나 이주씨 일족은 폭정과 부패를 일삼았고, 절민제는 이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결국 장군 유령주(劉靈助)와 고환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유령주는 쉽게 패배했지만, 고환은 불만을 품은 여러 장군들을 규합하며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처음에는 절민제의 황제 지위를 인정했던 고환은 곧 황족의 먼 친척인 원랑을 황제로 추대했다. 531년 6월 고환이 신도(信都)에서 거병하고, 10월에 원랑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북위에는 두 명의 황제가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고환이 퍼뜨린 소문으로 이주 씨족 내부에 불화가 생기자, 고환은 이주조를 격파하고 중요한 도시인 업성을 점령했다.

532년 봄, 이주씨 내부의 불화를 봉합하기 위해 이주세륭은 절민제에게 이주조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도록 요청했다. 곧 이주조, 이주천광, 이주중원, 이주도율(爾朱度律) 등이 이끄는 이주씨 연합군은 업성에서 고환과 맞붙었으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한릉 전투에서 고환에게 참패했다. 이주조와 이주중원은 각자의 본거지로 도주했고, 이주천광과 이주도율은 낙양으로 도망쳤다. 이때 낙양에서 장군 호사춘이 이주씨에 대항하여 봉기했고, 이주세륭과 이주염보(爾朱彦伯)를 살해했으며, 이주천광과 이주도율을 사로잡아 고환에게 넘겨 처형하게 했다.

고환은 낙양으로 진군하면서 처음에는 절민제의 인품을 고려하여 황위를 유지시킬 생각도 했으나[6], 장군 위란근이 절민제가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어 장차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조언하자 마음을 바꾸었다.[7][8] 결국 532년 4월, 절민제는 고환에 의해 폐위되어 숭훈사(崇訓寺)에 유폐되었다. 유폐된 절민제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붉은 문[명문가의 상징]은 결국 재앙을 가져오고;''

:''황실의 자색은 익숙해질 만한 것이 아니며;''

:''넘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일 년에 세 번이나 상황이 변한다;''

:''이것이 운이 가져다주는 것이며;''

:''진정한 도를 배우는 것이 더 낫다.''[4]

5월, 고환이 원수를 효무제로 옹립한 지 약 열흘 후, 절민제는 고환이 보낸 사신에게 독살되었다. 효무제는 절민제를 황제의 예우로 장례하지는 않았지만, 일반 제후보다는 격식을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했고 황실 관리들에게 조문을 명했다. 이후 서위에서 절민황제(節閔皇帝)로 추증되었다.

2. 4. 죽음

532년 3월, 이주천광 등이 한릉 전투에서 고환에게 패배하자[5], 4월에 원공은 궁궐에 들어온 고환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처음 고환은 자신이 옹립했던 안정왕 원랑의 혈통이 방계이고 원공의 인품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안정왕을 폐하고 원공을 다시 황제로 세우려 했다.[6] 그러나 황문시랑 최흥(崔㥄)[7]이 "광릉왕(원공)이 진정 현명했다면 고왕(고환)의 추대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주씨 일족에게 옹립된 자가 어찌 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대하자[8], 고환은 이를 받아들여 원공을 숭훈불사에 유폐시켰다. 결국 532년 5월, 원공은 문하외성(門下外省)에서 독살되었다.

이후 서위에서 절민황제(節閔皇帝)로 추증되었다.

3. 연호

절민제원년2년
서력531년532년
간지신해(辛亥)임자(壬子)
연호보태(普泰) 원년보태(普泰) 2년


4. 가족 관계

북위 절민제는 북위 황실의 일원으로, 효문제 원굉元宏|원굉중국어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효문제의 아들인 광릉왕 원우元羽|원우중국어이다. 따라서 절민제는 선무제 원각元恪|원각중국어의 조카이며, 효명제 원후元詡|원후중국어효장제 원자유元子攸|원자유중국어와는 사촌 관계에 해당한다. 그의 가계는 헌문제 탁발홍拓跋弘|탁발홍중국어, 문제 탁발준拓跋濬|탁발준중국어, 태무제 탁발도拓跋燾|탁발도중국어, 명원제 탁발사拓跋嗣|탁발사중국어, 도무제 탁발규拓跋珪|탁발규중국어로 이어지는 북위 황실의 직계 혈통이다.

4. 1. 부모

절민제의 아버지는 광릉왕 원우元羽|원우중국어이고, 어머니는 원우의 인 왕 부인王 夫人|왕 부인중국어이다. 아버지 원우는 북위 헌문제의 아들이자 북위 효문제의 형제였다.

4. 2. 황후

얼주 황후는 이주조의 딸이다.

4. 3. 자녀


  • 원자수( 元子恕|원자서zho ): 생모 미상. 배왕(沛王)에 봉해졌다.
  • 원자서: 생모 미상. 발해왕(渤海王)에 봉해졌다.

5. 평가와 영향

원공은 개인적으로 현명하고 신중하며 효심이 깊다는 평가를 받았으나[5], 이주씨 일족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정치적 한계를 지녔다. 그는 이주세륭 등 이주씨 세력의 전횡 속에서도 소극적으로나마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노력했지만[5], 그들의 폭정과 부패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그의 개인적인 자질은 빛을 발하기 어려웠다.

절민제의 짧은 치세는 북위 말기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황권의 약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5]. 그의 즉위는 이주씨 세력의 권력 장악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고환과 같은 반대 세력의 등장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한릉 전투에서 고환이 승리하고 절민제를 폐위시킨 사건은[6][8], 북위동위서위로 분열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서위에서는 훗날 그에게 절민황제(節閔皇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그의 존재와 폐위는 북위 말기 권력 투쟁의 격화와 국가 분열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5. 1. 성격과 자질

원공은 자신감 넘치고 의지가 강했으며, 할머니 맹 태후와 아버지 원우의 부인인 정 태후(유교적 관점에서 어머니로 모셔야 할 대상)에게 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진다.[5] 원차가 효명제 시기(520년-525년) 권력을 잡고 부패와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자, 원공은 병을 핑계로 말을 하지 못하는 척하며 불교 사찰인 용화사(龍花寺)에서 지냈다. 이는 당시 권력자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와 스스로를 지키려는 신중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해석될 수 있다.

효장제 재위 중, 원공이 실제로는 말을 할 수 있으면서 반역을 꾀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원공은 두려움을 느껴 상락산(上洛山)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체포되어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다행히 심문과 조사 결과 반역을 모의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다.[5]

훗날 고환은 원공의 인품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다시 황제로 세우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6] 하지만 황문시랑 최흥이 "광릉왕(원공)이 진정으로 현명하다면 고환의 추대를 기다렸을 것이다. 이주 일족에게 옹립된 인물이 어찌 천자가 될 수 있겠는가"라며 반대하여[7][8] 결국 무산되었다. 이는 원공 개인의 자질과는 별개로, 그가 권력을 잡게 된 과정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5. 2. 정치적 한계

절민제의 재위 기간 동안 얼주씨 일족은 중앙 정부, 지방, 군대의 주요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얼주사룡爾朱世隆|얼주세륭중국어이 중앙 정부를, 얼주조爾朱兆|얼주조중국어가 북부 지방을, 얼주천광爾朱天光|얼주천광중국어이 서부 지방을, 그리고 얼주중원爾朱仲遠|얼주중원중국어이 동남부 지방을 통제하는 등, 사실상 절민제는 얼주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민제는 미묘한 방식으로나마 정책에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려 했으며, 때로는 얼주사룡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얼주사룡이 관료 형자재(邢子才)에게 절민제의 명의로 일반 사면령을 작성하게 하면서 얼주영爾朱榮|얼주영중국어의 죽음이 효장제孝莊帝|효장제중국어의 매우 부당한 행위였음을 상세히 기술하도록 했을 때, 절민제는 이를 그대로 공포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직접 겸손한 어조로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않은 짧은 칙령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또한 자신의 칭호에서 '황'(皇) 자를 빼고 '황제'(皇帝) 대신 단순히 '제'(帝)로 칭하게 하여 스스로를 낮추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절민제는 자신보다 먼저 황제로 추대되었던 원엽元曄|원엽중국어을 존중하여 동해왕東海王|동해왕중국어으로 봉했으며, 경쟁국인 양나라에 대해 '가짜'(偽)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도록 명령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 아버지 원우元羽|원우중국어를 황제로 추존했으나[5], 어머니 왕부인(王夫人)에 대해서는 정실 왕비였던 정비(鄭妃)를 고려하여 황태후(皇太后)로 추존하는 데 그쳤다. 형 원영업元永業|원영업중국어을 고밀왕(高密王)으로, 아들 원서元恕|원서중국어를 발해왕(勃海王)으로 봉하는 등 황제로서의 권한을 일부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저항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주씨 일족이 자행하는 폭력과 부패를 막을 실질적인 힘은 없었다. 결국 얼주씨의 통치에 대한 불만은 유령조劉靈助|유령조중국어와 고환高歡|고환중국어 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532년 봄에는 얼주사룡이 얼주씨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는 명분으로 절민제에게 얼주조의 딸(얼주 황후)을 황후로 맞이하도록 강요하는 등, 절민제는 정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5. 3. 역사적 의의

북위 효문제의 조카인 원공의 짧은 재위 기간은 북위 말기의 극심한 권력 투쟁과 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효장제가 이주조에게 시해된 후, 이주세륭 등 이주씨 일파는 장광왕 원엽을 황제로 옹립했으나 곧 그를 폐위시키고 원공을 새로운 황제로 내세웠다[5]。 이는 당시 북위의 황권이 실권자들에 의해 좌우되었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원공의 즉위는 이주씨 세력의 권력 장악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촉발했다. 531년 6월, 고환이 신도에서 이주씨 타도를 명분으로 거병하였고, 10월에는 원랑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이 시기 남조 양나라의 지원을 받은 원열까지 황제를 칭하면서, 북위에는 동시에 세 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극도의 혼란 상태가 벌어졌다. 이는 북위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532년 한릉 전투에서 고환이 이주씨 군대를 격파하면서 권력 구도는 다시 한번 급변했다. 고환은 이주씨에 의해 옹립된 원공을 폐위시키고[6][8] 숭훈불사에 유폐시킨 뒤 암살하였다. 비록 원공 개인은 현명하다는 평도 있었으나[6], 권력 투쟁의 와중에 희생된 것이다.

결국 원공의 재위 기간에 벌어진 이주씨와 고환의 대립은 북위의 분열을 결정짓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환의 승리는 북위 멸망과 이후 동위서위로의 분열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으며, 원공의 짧은 치세는 이러한 격변기의 혼란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후 서위에서는 그에게 절민황제(節閔皇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6. 가계도


  • 위서』권1~권22, 『북사』권5・권14를 바탕으로 작성.

참조

[1] 서적 Bei Shi
[2] 서적 Book of Wei
[3] 서적 Book of Wei
[4] 서적 Bei Shi
[5] 서적 魏書
[6] 서적 資治通鑑
[7] 서적 資治通鑑
[8]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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